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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참된 성소

by 우목수 2026. 5. 31.

요즘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에외 없이 들려오는 변종 바이러스나 전염병 뉴스를 접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긴장되곤 합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터널을 지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때 우리는 참 많은 이웃을 잃었고, 여전히 그 시절의 후유증과 부작용으로 힘겨워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교육, 그리고 가정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지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피해 갈 수 없었지요. 그 대표적인 흔적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 예배'라는 신조어입니다.

전염병이 무섭게 창궐하던 시절, 정부의 모임 자제 권고 앞에 교회와 목회자들의 고민은 깊어만 갔습니다. 의견은 이내 두 갈래로 쪼개졌지요.

어떤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선언을 붙잡고 예배당 문을 열었습니다. 그것만이 예배를 사수하는 길이라 믿었으니까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가족과 공공의 안전을 위해 모임을 내려놓고 모니터 화면 앞에 마주 앉았습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던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는 날 선 비판과 갈등이 적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이 시기를 지나며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누군가는 교회가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 실망했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모이기를 힘쓰지 않아 믿음이 약해진 결과라며 씁쓸해했습니다. 교회가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처럼 내몰려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되돌아보면, "어떤 형식의 예배가 옳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위기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지켜내었는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거친 풍파 속에서도 우리는 결국 믿음을 지켜냈고, 이 자리에 서 있으니까요.

2,500년 전, 바벨론 포로들의 절망 속에서

재미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에스겔과 유대인들이 겪었던 고통이 우리가 겪은 혼란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탱하던 가장 큰 기둥은 소위 '성전 신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믿음이었죠.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자, 이 믿음은 순식간에 가장 잔인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물리적으로 예루살렘에 갈 수 없으니,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영적 파산 선고나 다름없었지요.

설상가상으로 예루살렘에 고스란히 남아있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간 형제들을 향해 모진 말을 쏟아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다." (겔 11:15)

 

자신들은 예루살렘을 지키며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여전히 선택받은 자들이고, 쫓겨난 이들은 하나님께 저주받아 버려진 자들이라는 냉소였습니다. 낯선 이방 땅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신음하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 뼈아픈 절망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정말 버림받은 것일까? 이방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없는 걸까?" 밤마다 눈물 섞인 질문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이 깊은 절망의 심연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눈물겨운 대답을 건네십니다.

"내가 비록 너희를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너희가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겔 11:16)

 

이 한마디는 공간에 갇혀있던 유대인들의 신앙을 뒤흔드는 경이로운 선포였습니다.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고정관념을 깨뜨리십니다. "성전 건물이 성소가 아니라, 내가 머무는 그곳이 바로 성소다. 그러니 너희가 있는 바벨론 포로지가 곧 성소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건물에 갇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일찍이 솔로몬도 성전을 짓고 봉헌하며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라며 고백했었지요.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기에 그분의 영광을 바벨론이든, 애굽이든, 세상 끝이든 원하는 곳으로 옮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약속 속에 담긴 "잠깐"이라는 단어는 포로기의 고통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흩어진 곳에서 모아 고향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회복의 약속(17절)이 뒤를 이었습니다.

돌 같은 마음을 깎아내고, 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은 포로들을 다시 모으실 때, 한 가지 단호한 조건을 덧붙이십니다. 조상들이 우상숭배로 더럽혔던 가증한 것들을 모두 제하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외치셨던 '회개'의 음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상을 깎아낸 자리에 하나님은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분열되지 않은 한마음을 주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여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돌 같은 마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신념, 정치적 노선, 철학, 과거의 경험을 더 우위에 두는 완고한 상태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도 전혀 깨지지 않는 단단한 돌짝밭이지요. 신앙 연수가 오래되었다고 자랑하는 이들 중에 의외로 이 단단한 돌 마음에 갇힌 이들이 많습니다.

 

살 같은 마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유연하고 부드러운 상태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달으면 언제든 나를 꺾고 바꿀 준비가 된 옥토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은 바로 이 부드러운 마음에서 맺힙니다.

말씀 앞에 우상의 고집을 버리고 부드러운 살의 마음을 회복할 때,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영원한 언약이 마침내 우리의 삶에 선명해집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11:20)

지금 나의 삶의 자리는

이 엄숙한 선포가 끝난 뒤, 하나님의 영광은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동쪽 산으로 이동합니다. 공간만 차지한 채 자신들이 선택받았다고 착각하던 예루살렘 주민들의 확신은 허무한 신기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건물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비록 화려한 건물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시작된 바벨론의 강가는 눈물 변하여 거룩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 혹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줄도 모른 채, 그저 매주 익숙한 예배당 의자에 앉아 출석 도장을 찍는 것만으로 은혜도 감동도 없이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곳이 성소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셔야만 그곳이 참된 성소입니다.

예배당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이 발을 딛고 살아갈 가정과 일터, 그 치열한 삶의 자리가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 찬 참된 성소가 되기를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