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하덕규 씨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드렸던 처절한 신앙 고백이 담긴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가시나무’라는 곡입니다. 이 곡의 가사에 담긴 고백은 우리의 심령을 매우 강력하게 울립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가사는 이어서 고백합니다. 당신의 쉴 자리를 빼앗는 것들이 내 속에 가득한데, 그것은 바로 ‘나의 헛된 바람’,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그리고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이라고 말입니다. 이것들이 내 속에서 무성한 가시나무 숲을 이루고 있기에, 주님이 편히 쉬실 곳이 없다고 처절하게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랐기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 중에 머무실 곳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당시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자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이 땅을 외면하셨다"라며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했습니다.
돌아보면 사실 저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 속에 있는 가시와 같은 우상들이 하나님을 성전 밖으로 자주 쫓아내곤 합니다. 분주함, 불안, 욕심, 염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그렇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실소마저 나오는 것은, 지극히 찌질하고 보잘것없는 제 안에도 여전히 세상적인 명예욕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정욕들이 내 안에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아, 참으로 떨리고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지나온 길지 않은 삶을 되돌아보면, 제 나름대로 수많은 아픔과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내면의 우상들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에스겔 선지자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호통을 치며 떨리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지만, 이 회개의 때를 놓쳐버린다면 그 끝은 너무나도 슬픈 결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참된 정체성: 화려함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 장소를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며, 그곳에 친히 머물러 계실 때에만 비로소 영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성전이 거룩한 이유는 건물 자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곳이 거룩했던 이유는 건물이 화려하고 멋지며 거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당신의 처소로 인정하시고, 그곳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실제로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을 떠나버린다면, 그 웅장한 성전도 결국 세상의 수많은 일반 건축물 중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성전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곳에 지금 하나님이 계시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그 어디나 거룩한 곳이 되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하고 거대하며 웅장한 건물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영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에스겔이 본 심판의 환상: 구원의 표에서 심판의 불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예루살렘의 영적 실상을 낱낱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읍을 파괴하는 권세를 가진 천사들을 불러 예루살렘을 징계하십니다.
그 와중에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통을 찬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읍 중에서 행해지는 우상숭배를 거절하며 탄식하는 신실한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여 구원받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구원의 인치심이 끝난 뒤 시작된 하나님의 징계는 매우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나이나 성별,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으며,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공의로운 심판이었습니다.
구원받을 이들을 구분하여 표하는 임무를 마친 천사가 돌아왔을 때, 에스겔은 그룹들의 머리 위 공간에 있는 보좌 형상, 곧 남보석(사파이어) 같은 장엄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천사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이 새로운 임무는 예루살렘 성의 우상숭배자들을 심판하는 데서 나아가, 성읍 전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조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는 베옷을 입은 그 천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룹 밑 바퀴 사이에 있는 숯불을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 예루살렘 성읍 위에 뿌리라.”
이제 천사의 역할은 서기관의 먹통을 차고 구원받을 자를 찾아 선택하는 자비의 사역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무서운 불을 내리는 심판의 사역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대상을 찾아 표시하던 천사의 손에 이제는 성읍을 파멸시킬 심판의 불이 쥐어진 것입니다.
이 역할의 전환은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천사들의 임무보다 훨씬 더 전면적이고 강력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읍 위에 거룩한 숯불을 뿌리는 사역은, 과거 죄악으로 가득했던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비처럼 내려 온 성을 흔적도 없이 멸하셨던 엄위하신 심판의 장면을 강렬하게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동하는 징조
가는 베옷을 입은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숯불을 가지러 바퀴 사이로 들어갈 때,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었고 안뜰은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에스겔 10:3-4). 천사가 그룹의 바퀴 사이로 들어갈 때 안뜰에 구름이 가득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여호와의 영광이 아직은 그 성전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머물러 계심을 보여주는 마지막 징표였습니다.
성경에서 이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상징해 왔습니다.
- 출애굽기 성막의 전례: 출애굽기의 가장 마지막 장을 보면,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여 모세조차도 감히 회막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구름은 여호와의 충만한 영광이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심을 뜻합니다.
- 솔로몬 성전 헌당식의 전례: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지성소에 들여놓았을 때에도, 성전에 구름이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그 영광으로 인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습니다. 이 역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게 임하셨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구름이 가득한 모습을 볼 때, 지금까지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머물러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가슴 아픈 영적 이동이 시작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본래 계시던 그룹 위에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자리를 옮기신 것입니다.
광야의 성막 시절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시는 가시적인 장소는 언제나 지성소 안, 곧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의 그룹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광이 지성소를 벗어나 '문지방'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에 더 이상 머무실 수 없어 이제는 그곳을 완전히 떠나려 하신다는 단절의 신호였습니다(에스겔 9:3).
여호와의 영광이 이동할 때, 그들을 수종 드는 그룹들의 날개 소리가 온 성전에 울려 퍼졌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웅장하고 두려운지 마치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처럼 바깥뜰에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대한 이동, 즉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위한 이륙의 날갯짓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바퀴 환상과 즉각적인 순종
에스겔이 다시 집중하여 바라보니, 그룹들의 곁에 네 개의 바퀴가 있었습니다. 이 신비로운 바퀴들은 그룹들이 움직일 때 결코 방향을 틀거나 지체하지 않고, 머리가 향하는 쪽을 향해 곧장 앞으로만 움직였습니다. 또한 그 사물의 형상은 매우 신비로워서,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 그리고 바퀴의 둘레에 영적인 눈이 가득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 그룹들에게는 네 개의 면이 있었는데, 각각 그룹의 얼굴, 사람의 얼굴, 사자의 얼굴,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가만히 살펴보니, 이 존재들은 다름 아닌 자신이 이전에 바벨론 땅 그발 강가에서 환상 중에 목격했던 바로 그 거룩한 생물들이었습니다.
이 그룹들이 움직일 때 바퀴와 날개도 유기적으로 함께 움직였습니다. 이 놀라운 움직임을 가능하게 감동하는 원동력은 바로 ‘바퀴 가운데 있는 생물의 영’이었습니다(에스겔 10:17). 이는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하나님의 군대와 영적 존재들이 주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언제든지 명령을 실행할 역동적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여호와의 공의로운 뜻을 따라 가는 베옷을 입은 천사는 심판의 숯불을 성읍에 뿌릴 준비를 마쳤고, 그룹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언제든 이 죄악 된 성전을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여호와의 영은 그룹들 위의 보좌에 정좌해 계시므로, 이제 그룹들의 날갯짓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가실 것입니다.
건물에 갇히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당신께서 왜 이 아름다운 성전을 떠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에스겔 8:6)
예루살렘의 극심한 우상숭배 때문에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도저히 그곳에 함께 머무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우상 숭배자들은 적반하장으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라며 거짓을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그토록 거룩하고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장소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오직 여호와께서 그곳에 임재해 계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순금으로 화려하게 내부를 치장하고, 외형을 거대하고 웅장하게 건축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 광야의 보잘것없는 성막에서도 여호와께서는 동일한 영광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하셨습니다. 초라한 천막에 불과했던 성막이 감히 온 우주의 중심이자 거룩한 처소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오직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과거 다윗 왕이 평안할 때에 하나님을 위하여 백향목으로 화려한 성전을 짓겠다고 자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사무엘하 7:5-7)
또한 이사야 선지자 역시 건물의 화려함에 도취해 중심을 잃어버린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을 이와 같이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사야 66:1)
이 대언의 말씀들이 강조하는 본질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고정되고 화려한 인공 건축물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한복판에서 그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외형적인 건물의 수려함이나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예배를 드리는 백성들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고 거대하며 웅장한 종교적 외형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십시오
오늘날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영적 현실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그리고 고백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을 따라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거룩한 집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환상을 엄중하게 바라보십시오. 지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을 위해 친히 싸우시며, 대적의 손에서 지키시고 만나주시던 임재의 처소를 미련 없이 떠나려 하십니다. 이 비극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마음의 성소에 우상을 가득 채움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으로 하여금 더 이상 그곳에 머무실 수 없도록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를 통해 예루살렘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죄는 은폐한 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라고 비열한 거짓말을 일삼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중심을 날마다 정결하고 거룩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을 깨끗하게 유지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와 평생을 함께 움직이시고, 우리를 가로막는 영적 전쟁에서 친히 싸우시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못하여 세상을 서성거리고, 세상의 유혹을 따라 경건의 모양을 버리며 거룩한 삶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실상 내 스스로가 하나님이 내 안에 머무시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나를 위해 싸우시고 인도하시는 사역을 내 손으로 거절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파산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우리 역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섞인 가시 돋친 말을 내뱉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어. 하나님은 왜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지켜주지 않으시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원망의 순간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슴을 치는 준엄한 책망의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먼저 세상의 우상을 탐하여 나를 버렸고, 너희의 그 가증한 죄악이 나로 하여금 내 성소에서 스스로 떠나게 만들었느니라.”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우선시하며,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그 모든 세상적인 것들(돈, 명예, 분주함, 염려)을 신뢰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세상의 대체품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려 할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은 결국 우리를 떠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삶에는 더 이상 여호와의 신령한 도우심도, 세상을 이길 보호하심도, 죄악에 대한 승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가꾼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성전이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처럼 우리의 삶 전체를 가시나무 같은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 마음에 합한 거룩한 삶으로 일구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마다 내 안의 가시나무 같은 우상들을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고, 온전히 주님만을 모셔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는 거룩하고 신실한 주님의 성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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