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확신'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심 없이 확신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랐지요. 내가 간절히 기도하던 제목이 이루어지고, 남들보다 더 나은 조건과 물질, 평안을 누릴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부르며 손을 높이 듭니다.
하지만 문득 이런 두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풍요와 확신은, 정말 하나님이 주신 복이 맞을까?"
에스겔 11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보며, 오늘날 우리의 '확신'을 조용히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가마솥 속의 특등 살코기다"라는 착각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예루살렘 동문으로 가니, 그곳에 나라를 움직이는 고위 관리 25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침공을 두 번이나 받아 이미 경제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왕족과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은 이미 포로로 다 끌려간 뒤였죠.
그런데 그 혼란을 틈타 권력의 빈틈을 차지한 이 25명의 관리들은 묘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힘없는 약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졸부가 된 그들은,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이 성에 남아서 부와 권력을 쥐게 된 상황을 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한 가마솥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보호받는 최상급 살코기다!"
이들에게는 의심 없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저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폐기물이고, 끝까지 살아남아 부귀영화까지 누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인과론적인 확신이었죠. 눈앞에 보이는 성공과 생존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증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마솥의 의미를 바꾸실 때
그러나 이들의 확신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거절당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안다." (겔 11:5)
하나님은 그들이 겉으로 누리는 성공 이면에 숨겨진 불의와 탐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확신했던 '안전한 가마솥'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가마솥은 관리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피 흘리게 해 담아둔 '시체들의 저주스러운 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그 성읍에서 그들을 끌어내어, 이스라엘 국경 바깥에서 이방인의 칼에 심판받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겉보기에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어 보이고, 모든 상황이 "하나님은 네 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도, 정의와 공의가 상실된 확신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거짓 믿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현실의 성공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이 엄중한 말씀은 오늘날 현대 교회가 빠진 무서운 함정을 날카롭게 찌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선택과 복을 '재물'과 '권력', '성공'으로 확인하려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쟁취해 놓고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둔갑시킵니다. 그리고 의심 없이 확신하니 믿음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신구약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그런 경건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 아모스 선지자는 일상의 삶에서 정의가 상실된 제사와 노래를 그치라고 외쳤고,
- 이사야 선지자는 고아와 과부, 헐벗은 자를 돌보는 것이 진짜 금식이라 말했습니다.
- 예수님 역시 십일조는 철저히 하면서도 삶 속에서 정의와 긍휼, 믿음을 버린 바릴새인들을 향해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신앙은 사후의 천국만을 보장받는 티켓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 즉 사랑과 정의를 구현해 내는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무언가를 '얼마나 많이 누리는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거룩하고 정의롭게 누리는가'에 영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름뿐인 구원, 사라지는 소망
에스겔의 예언이 선포되던 그 현장에서, 영화의 쿠키 영상처럼 한 남자의 죽음이 소개됩니다. 25명의 관리 중 하나였던 '블라댜'가 그 자리에서 급사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이름 뜻입니다. 블라댜는 '여호와가 구원하셨다'라는 뜻이고, 그의 아버지 브나야는 '여호와가 세우셨다'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망 찬 이름인가요? 그들은 자신의 이름처럼 예루살렘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확신 속에서 그 화려한 이름은 아무런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인간이 가진 헛된 소망과 확신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표징이었습니다.
우리의 확신을 멈추고 질문해야 할 때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부와 권력의 중심에 서서 그것을 '은혜'라고 자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의 불의함을 지적하곤 합니다. 범죄를 감추고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선언하는 모습은, "우리는 안전한 가마솥 안의 최상급 살코기"라며 우쭐대던 에스겔 당시의 관리들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확신이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면, 아무리 의심 없이 믿어도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늘 나의 삶을 채우고 있는 평안과 성공의 고백들이,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열매인지 조용히 묵상해 봅니다. 겉으로 보이는 조건에 속지 않고, 오늘도 내 일상에서 정의와 긍휼, 그리고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발맞추어 걷는 참된 성도의 삶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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