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려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는 이른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강력한 힘에 의해 세계의 평화가 유지되던 시기였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주후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 이어진 이 황금기는 겉보기에는 내전이 종식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룬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 평화는 철저히 로마 제국의 시각에 불과했다.
로마의 평화는 강력한 군사력에 근거하여 식민지 백성들에게 강요된 억압의 결과물이었다. 제국은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점령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자원을 수탈했으며, 자신들의 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했다.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인용한 스코틀랜드 족장 칼가쿠스의 비판처럼, "그들은 약탈하고 사육하고 도둑질하는 것을 제국이라 부르고,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든 뒤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 이러한 폭력적인 질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황제의 개선식이었다. 로마의 개선 행진은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황금 촛대 같은 전리품과 쇠사슬에 묶인 포로들을 전시하고, 행진의 끝에서 반란 지도자를 공개 처형하며 제국의 권력과 잔혹함을 과시하는 국가 의식이었다. 즉, 세상이 말하는 평화란 강자가 무력으로 약자를 짓밟고 빼앗아 유지하는 폭력과 거짓의 평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러한 로마 황제의 화려하고 폭력적인 행진과는 완벽하게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은 전쟁을 상징하는 용맹한 말이 아니라, 일상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는 평범한 동물인 나귀를 타셨다. 특히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것은 구약성경 민수기에 등장하는 '멍에 메지 않은 암송아지'가 속죄제로 드려진 것처럼, 예수님께서 흠 없고 순결한 대속의 희생물이 되실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무력과 억압으로 군림하는 제국의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고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희생을 통해 진정한 평화를 이루시겠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평화의 왕을 향해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일상에서 생존의 필수품이자 전당조차 함부로 잡을 수 없었던 겉옷을 바닥에 깐 행위는, 과거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때 무리들이 보였던 전폭적인 헌신과 복종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아이자 왕으로 인정하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찬송했는데, 이는 성탄절에 천군 천사가 불렀던 그리스도 탄생의 찬송과 정확히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 찬양을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제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예수님은 "이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입성이 단순한 환영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필연적으로 성취되는 거대한 사건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만약 피조물들이 이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억압과 폭력에 의해 무너진 성벽의 폐허 속 돌들이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세상의 정치인들은 여전히 힘의 균형이나 권력을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지만,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쟁들이 증명하듯 힘으로 이룬 평화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헛된 것이다. 영원하고 참된 평화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희생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무력과 야만의 시대 속에서 수많은 전쟁터의 폐허와 돌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지금, 우리의 역할은 분명하다. 영원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통치를 삶으로 인정하고 따르며, 그 평화를 세상에 힘써 외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겉옷을 바닥에 깔며 주님께 순종하는 참된 믿음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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