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장 1~11절)
최근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채해병 특검의 일환으로 극동방송, 여의도순복음교회 등 기독교 단체와 목회자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은 전례 없는 사건으로,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당혹감을 안겼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일부는 “교회를 건드리다니 적그리스도 같은 정권인가?”라며 분노했고, 다른 일부는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구나”라며 한국 교회의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는 이번 사건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피로 세운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느껴졌습니다. 정치적 탄압이나 진영 논리로만 볼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향력과 참된 성도의 삶의 관점에서 이 문제의 본질을 깊이 성찰해야 할 시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어쩌면 ‘맛을 잃은 소금’의 비참한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선명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창세 전에 택하셨고(에베소서 1: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에베소서 1:5). 이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에베소서 2:8-9).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고, 만물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음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18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으며,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기 전과 후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에베소서 2장 1절은 "그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선언합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부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생을 주도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 세상의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을 따를 뿐입니다(에베소서 2:2).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추구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유행과 습관에 휩쓸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과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제 ‘너희’라는 표현 대신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죽었던 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났음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일으킴을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을 때 우리도 함께 앉게 되었습니다(에베소서 2:5-6). 이전에는 악한 영을 따르던 진노의 자녀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삶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를 띠고 가고 싶은 대로 갔지만, 그리스도를 안 이후에는 다른 사람이 띠를 띠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우리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정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2장 10절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쉬운 성경으로 보면, 우리를 창조하시고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을 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안에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그렇게 계획해 놓으신 것입니다.
즉, 구원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의 풍조나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길입니다.
많은 이들이 구원의 확신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습니다. 만약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고 옳지 못한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구원 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돈, 안락함, 권력, 출세가 유일한 목표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과 출세가 보이는 곳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몰려가는 것이 요즘 시대의 풍조입니다. 이러한 치열한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교회가 맛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인 이집트의 안토니우스(251년생)의 삶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그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마태복음 21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를 읽고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여동생을 수녀원에 보낸 뒤 자신은 수도사가 되어 광야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순교를 소망하여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다녔으나, 313년 기독교 공인으로 인해 순교의 기회를 놓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이고자 했던 안토니우스조차 수도 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큰 유혹 중 하나가 ‘무엇을 해 먹고 살지?’ 즉 미래에 대한 염려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고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에베소서 2:10).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에 대한 전인격적인 반응입니다. 내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예민해져야 합니다. 세상의 풍속이 너무나 강력해져 돈, 권력, 출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소망, 명령, 숙제에 둔감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출세하고 돈을 벌고 권력을 갖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예민함을 잃는다면, 우리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전에 미리 예비하신 것입니다(에베소서 2:10).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합당하게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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