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근예배자료/저서 & 글모음

무너진 성벽 틈에서, 하나님은 누구를 찾으시는가

by 우목수 2026. 9. 27.

 

에스겔 22장을 읽다 보면 서늘한 기운이 감돕니다. 2,600여 년 전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을 향한 고발장이, 마치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교회를 거울로 비추어 쓴 글처럼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귀에 달콤한 평안과 회복을 속삭였지만, 선지자 에스겔은 차갑고 명확하게 파멸의 원인을 짚어냅니다. 병의 원인을 바로 알아야 헛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듯, 심판의 이유를 직면해야 참된 돌이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죄는 ‘사회적 죄’와 ‘종교적 죄’가 얽혀 있었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사회적 죄는 사법적 징벌을 부르고, 우상 숭배와 타락이라는 종교적 죄는 부정함을 낳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자를 돌보라고 맡기신 권력으로 오히려 피를 흘렸고, 부모를 가볍게 여겼으며,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부모를 ‘업신여기다(헤칼루)’는 말은 ‘가볍게 여기다, 하찮게 대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카베드)’고 명하실 때 쓴 단어가 ‘무겁게 여기다’라는 뜻임을 생각하면, 이는 단순한 윤리적 결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정면으로 뒤집은 반역이었습니다.

 

이 모든 타락의 뿌리에 대해 하나님은 단 한 문장으로 진단하십니다. “네가 나를 잊어버렸도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자 공의와 사랑은 사라졌고, 종교적 열심은 공허한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손을 높이 들고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부모를 소홀히 하고 이웃을 착취하는 삶. 예수께서 그토록 경계하셨던 ‘겉은 번드르르하나 속은 죽은 뼈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의 모습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교제하던 관계인 ‘너’라는 호칭을 거두시고,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듯 ‘그들(이스라엘 족속)’이라 부르시며 더 이상 순수한 은이 아닌 ‘풀무불 속의 찌꺼기’라 선언하십니다. 연단이 아닌, 완전히 태워버릴 심판의 불길이 예루살렘을 덮쳐온 것입니다.

 

에스겔서를 묵상하다 가장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은 30절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망시키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소돔과 고모라가 열 명의 의인이 없어 무너졌듯, 하나님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단 한 사람’을 찾으셨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권력 곁에서 거짓 축복을 남발하는 종교인은 넘쳐났으나, 무너진 성벽 틈 사이에 무릎 꿇고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온몸으로 막아설 중보자는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경건은 유창한 기도나 종교적 의식의 완벽함에 머물지 않습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태도, 연약한 이웃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배려, 물질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선택 속에 진짜 신앙의 증거가 남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한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무너진 자리를 막아설 단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살아내며 그 거룩한 틈을 메우는 그 한 사람. 그 부르심 앞에 두려움 대신 어린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해 두려움 없는 확신으로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